조충 (창서)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조충은 조조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총명함과 인자함으로 칭송받았으며, 코끼리의 무게를 재는 일화와 쥐가 안장을 갉아먹은 사건에서 지혜를 발휘했다. 그는 아버지 조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13세의 어린 나이에 요절했으며, 사후 래애왕으로 추존되었다. 조조는 조충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며, 후계자 문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충은 친절하고 이해심이 많은 인물로 평가받으며, 억울한 사람들을 돕고 아버지에게 관대한 처분을 요청하는 등 긍정적인 면모를 보였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6년 출생 - 전종
전종은 삼국시대 오나라의 장수로 손권의 사위였으며 위장군, 좌호군, 서주목 등을 지내며 중용되었으나, 태자 쟁립에 관여하여 가문의 몰락을 초래했다. - 196년 출생 - 석포
석포는 발해군 남피현 출신으로 위나라와 서진 시대에 활약하며 사마씨 정권에서 중용되어 동흥 전투와 제갈탄의 난에서 공을 세웠고, 대사마에 임명되었다가 면직된 후 사도로 농업 진흥에 기여하다 272년에 사망했다. - 208년 사망 - 화타
화타는 중국 후한 말의 명의로, 약물 처방, 침술, 마취 수술 등 뛰어난 의술을 펼쳤으며, 조조의 치료를 거부하여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208년 사망 - 공융
공융은 후한 말기의 학자이자 관료이며 공자의 후손으로, 문학적 재능과 직언으로 유명했으나 조조에게 미움을 받아 처형당했다. - 보저우시 출신 - 장자
장자는 중국 전국 시대의 철학자로, 《장자》를 저술하여 개인의 자유와 무위자연의 삶을 추구했으며 노장사상으로 도교에 영향을 미쳤다. - 보저우시 출신 - 조조
후한 말기의 정치가이자 군사가, 시인이었던 조조는 뛰어난 능력으로 위나라의 기반을 다졌으나, 잔혹한 행위와 권력욕으로 인해 후대 평가에서 논쟁적인 인물이다.
조충 (창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조충 |
한자 표기 | 曹沖 |
자 | 창서 (倉舒) |
시호 | 애왕 (哀王) |
가문 | 조씨 |
생애 | |
출생 | 196년 |
사망 | 208년 (향년 12세)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조조 |
어머니 | 환씨 |
2. 생애
조충은 어릴 때부터 명석하여 두 가지 일화를 남겼는데, 하나는 코끼리의 무게를 잰 것이고, 다른 하나는 쥐가 말 안장을 쏠아 곤경에 처할 뻔한 병사를 구한 이야기이다.
또한, 조충은 억울하게 형벌을 받는 사람들의 사정을 헤아리고, 평소 성실한 관리들이 사소한 실수로 처벌받는 것을 관대하게 해 줄 것을 아버지 조조에게 요청했다. 조조는 조충의 총명함과 인자함을 칭찬했다.[6][7] 조충은 친절하고 이해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부당한 혐의로 기소된 사람들의 사건을 검토하여 수십 건을 성공적으로 해결했다.
조충은 뛰어난 총명함, 동정심, 그리고 수려한 외모로 형제들 사이에서 단연 돋보였으며, 아버지 조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8] 조조는 여러 신하들 앞에서 조충을 칭찬하며 후계자로 삼을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9] 조충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총명하며 따뜻한 마음씨를 지녀 가신들의 신망이 두터웠고, 그의 장래는 매우 밝아 보였다. 조조 역시 조충의 재능을 매우 아껴, 한때는 적자인 조비보다 조충을 후계자로 삼으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17] 그러나 조충은 13세 (혹은 12세[15])의 어린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21] 사후, 래애왕(鄧哀王)으로 추존되었다.[18]
조조의 전의(典醫)였던 화타는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명의였다. 그러나 조조가 화타를 중용하지 않자, 화타는 의학서를 가지러 간다는 핑계로 고향에 돌아간 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분노한 조조는 간언하는 부하들의 말도 듣지 않고 화타를 투옥하여 고문 끝에 죽였다. 조충은 이 소식을 듣고 슬픔에 잠겨 죽었다고 전해진다.
조조는 위독한 조충을 살리기 위해 의원뿐만 아니라 평소 미신이라며 멸시하던 "점쟁이"까지 각지에서 불러 모아 기도를 올리게 했다. 조충이 죽은 후에는, 같은 시기에 죽은 아름다운 견씨 가문의 소녀의 유해를 구해 혼례와 장례를 함께 치렀다고 한다.[19] 요시카와 코지로는 "이것은 소위 명혼의 가장 이른 예시 중 하나"라고 『삼국지실록』에서 언급했다.[20]
조충의 죽음은 조조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조조는 조비에게 "창서(조충)의 죽음은 나에게는 큰 불행이지만, 너에게는 다행이다. 이로써 네가 나의 후계자가 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라고 비꼬았다고 한다.[21] 조비 역시 즉위 후 "만약 죽은 형 조앙이 살아있었다 해도 한계가 있었을 것이나, 창서가 살아있었다면 나는 결코 천하의 주인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회고했다.[22]
2. 1. 코끼리 무게 재기 (조충칭상)
조조가 남방 지역 오나라 왕 손권으로부터 코끼리 한 마리를 선물 받았다.[4] 북방 지역 사람들은 이전에 이렇게 큰 동물을 본 적이 없었기에, 조조는 코끼리의 몸무게를 알고 싶어했다.[4] 하지만 코끼리 무게를 잴 만큼 큰 저울이 없어, 신하들 중 누구도 코끼리의 무게를 측정할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했다.[4][23]이때 조조의 다섯 살 난 막내 아들 조충이 나서서, 코끼리를 배에 태우고 수면 높이를 표시한 뒤, 코끼리를 대신하여 다른 물건을 배에 실어 같은 높이가 될 때까지 무게를 재는 방법을 제안했다.[4][23] 조충은 배가 표시된 곳까지 잠기면, 돌들의 무게를 모두 합하여 코끼리의 무게를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4] 조조는 매우 기뻐하며 조충의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겼다.[4]
조지프 니덤에 따르면, 고대 중국에서는 아르키메데스 원리와 같은 공식적인 논문은 없었지만, 초기 한나라 (기원전 202년–서기 220년)에 편찬된 ''주례''에서 부력에 대한 관찰적 선례가 있었다.[4]
2. 2. 쥐가 갉아먹은 안장
조조는 말을 무척이나 아꼈고 값비싼 안장들도 몇 개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조조의 안장이 쥐에게 갉아 먹혔다.[24] 당시 이는 불길한 일로 여겨져 조조는 창고 관리자를 처벌하려 했으나, 조충이 자신의 옷에 구멍을 내어 그것을 조조에게 보이며 "몸에 걸치고 있는 옷조차 쥐에게 갉아 먹힐 정도로 쥐가 늘어났으니, 창고 안에서 벽에 걸려 있던 안장이 갉아 먹힌 것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게 함으로써 창고지기를 무죄로 만들었다고 한다.[24]당시 전쟁 중에는 법이 매우 가혹했기 때문에 창고 주인들은 목숨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묶고 조조에게 잘못을 시인하여 관대한 처벌을 받기를 바랐다. 조충은 그들에게 "사건을 보고하기 전에 사흘을 기다리세요."라고 말했다. 그는 칼로 옷에 구멍을 내서 쥐에 의해 손상된 것처럼 보이게 한 다음, 슬픈 척했다.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묻자, 그는 "쥐에게 옷을 갉아 먹힌 사람은 불운을 겪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 저에게 이런 일이 생겼으니, 뭔가 일어날까 두렵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조조는 "이건 단순한 미신일 뿐이다. 걱정할 필요 없다."라고 말했다. 창고 주인들이 사흘 뒤 조조에게 안장 사건을 보고하자, 조조는 웃으며 "내 아들의 옷은 그와 함께 있었는데도 쥐에게 갉아 먹혔으니, 창고에 있던 내 안장이 손상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 문제를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3. 죽음과 후계
건안 12년(208년), 조충은 13세의 나이로 병에 걸려 죽었다. 조조는 조충을 살릴 수 없었으므로 명의 화타를 죽인 것을 크게 후회했다.[10] 조조는 조충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눈물을 흘렸으며, 어느 견(甄)씨 가문의 사망한 여성과 함께 매장하고[11] 죽은 아들에게 기도위(騎都尉) 벼슬을 추증했다.[11]
조조는 조비, 조창, 조식 같은 다른 아들들에게 '그의 죽음은 나에게는 불행이나 너희들에겐 행운이다.'라며 내심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던 듯한 말을 남겼다.[10] 조충의 동생 조거의 아들인 완후(宛侯) 조총(曹琮)이 조충의 후계자로 지정되었으며, 217년 조총은 등후(鄧侯)에 봉해졌다.[12]
조비는 황제가 된 후에 "내 형님 (조앙)은 ''효렴''이었고 후계자가 될 자격이 있었다. 만약 창서가 살아있었다면, 나는 천하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14]
황초 2년(221년), 조비가 조위를 건국한 후, 조충에게 시호 "등애후(鄧哀侯)"를 내렸지만, 나중에 공(公)의 지위로 격상되어 조충은 "등애공(鄧哀公)"으로 알려지게 되었다.[13] 태화 5년(231년), 조비의 아들 조예의 통치 기간 동안, 조충은 "등애왕(鄧哀王)"으로 추존되었다.[13]
4. 가족 관계
조충은 조조와 첩 환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었다. 그는 조거와 조우라는 두 명의 남동생이 있었다.[2] 조거의 아들 조종은 황명으로 백부 조충의 뒤를 받들었다.
5. 평가
조충은 친절하고 이해심이 많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부당한 혐의로 기소된 범죄자들의 사건을 검토하여 수십 건의 사건을 성공적으로 해결했으며,[6] 사소한 과실로 어려움을 겪는 성실한 관리들을 변호하고 아버지 조조에게 그들을 사면하도록 설득했다.[7]
조충은 총명함, 동정심, 그리고 수려한 외모로 형제들 사이에서 단연 돋보였으며, 아버지 조조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8] 조조는 여러 차례 신하들 앞에서 조충을 칭찬하며 후계자로 삼고 싶다는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9]
참조
[1]
Sanguozhi
[2]
Sanguozhi
[3]
Sanguozhi
[4]
Sanguozhi
[5]
Sanguozhi
[6]
Sanguozhi
[7]
Wei Shu
[8]
Wei Shu
[9]
Sanguozhi
[10]
Sanguozhi
[11]
문서
[12]
Sanguozhi
[13]
Sanguozhi
[14]
Weilue
[15]
문서
[16]
wikisource
三國志/卷20#武帝諸子
[17]
wikisource
三國志/卷20#武帝諸子
[18]
wikisource
三國志/卷20#武帝諸子
[19]
wikisource
三國志/卷20#武帝諸子
[20]
서적
三国志実録
筑摩書房
1997-03-10
[21]
wikisource
三國志/卷20#武帝諸子
[22]
wikisource
魏略輯本/卷四#鄧王沖趙王幹(二條)
[23]
wikisource
三國志/卷20#武帝諸子
[24]
wikisource
三國志/卷20#武帝諸子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